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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신은 일을 낳는다

체크리 2019. 12. 30. 00:03

작년 말부터 처음으로 정부 과제에 선정돼서 각종 과제 책임자가 됐다. 내가 기획하고, 계획서 쓰고, 제안하고, 실행했으니 결산도 내가 해야 한다. 그래서 각종 과제의 전체 과정을 좀 빠르게 경험해볼 수 있었는데, 여기서 참 안타깝고도 서글픈 여러가지 사실들을 발견했다.

우리나라, 특히 공공과 함께 하는 사업을 하다보면 얼마나 불신이 만연한 사회인지 알게 된다.

일단 제안서 PT를 하러 가면 보통 7명 이상 평가자들이 있다. 외부 평가자 비율이 일정 정도를 넘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과제 주관 기관에서는 여러 말 나오는 것도 피곤하고 하니 그냥 평가자 전원을 외부인으로 채운다. '여러 말 나오는 것도 피곤하니'가 결국 문제다. 주관기관 담당자가 평가자로 끼어 있으면 당락에 따라 구설수의 주인공이 될 수 있으므로 애초에 그런 여지를 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후에 과제를 수행하다보면 이제 매월 각종 증빙에 치인다. 매출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명은 계약서보다는 계산서다. 세금계산서는 국세청에 신고 되고, 국가 보조금 관리 프로그램 'e나라도움'이랑 연동돼 있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계산서 외에 다른 증빙을 또 요구한다. 계산서를 일명 '가라'로 발행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다. 물론 온갖 증빙도 사실 어떻게든 가짜로 만들어 내는 방법은 있다. 선의를 가지고 과제를 수행하는 기업이라면 어차피 성실하게 증빙을 제출할테고, 눈먼 돈 빼먹으려는 기업이라면 증빙도 가짜로 만들텐데 증빙이 다 무슨 소용인가 싶긴 하지만 아무튼 이중삼중 증빙을 해야 담당자가 안심할 수 있다고 하니 뭐... 대체 이 불신 때문에 몇 명이 일을 더 해야 하는 거냐.  

과제 평가도 정말 비효율의 극치다. 매월 사업 보고서를 쓰는데, 결산 보고서를 또 써야 한다. 결산 보고서는 사업수행 계획서에 있던 내용을 약간 바꿔서(절대로 그대로 쓰지는 못하도록 교묘하게 항목을 바꿔놓는다) 또 써야 하고 결과 보고를 최종적으로 또 하는데, 성과 증명은 전부 출력해서 표지를 붙이고 지시받은 수량만큼 제본을 떠서 우편으로 부쳐야 한다. 그 전까지는 그냥 매월 페이퍼워크 해야 한다고 투덜대기만 하다가 여기서 정말 무릎을 꿇었는데, 이렇게 종이 낭비 하지말고 1) 그냥 파일로 보내서 프로젝터나 모니터로 띄워놓고 같이 보거나 2) 평가자들한테 파일을 보내서 각 평가자들이 점수를 매겨서 취합을 하는 등 방법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서로에게 가장 효율적인건 주관 기관 직원이나 권한 있는 책임자가 직접 회사를 방문해서 실제 성과와 증빙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걸 기반으로 평가를 하는거다. 회사에는 자료가 다 있으니 얼마든지 필요한 서류를 요청할 수 있고 심지어 면담까지 가능하다. 

그러면 누군가는 그러겠지(예를 들면 언론사 사설 쓰는 분들). 가서 접대나 촌지를 받을 가능성도 있고 또 뭐... 이런저런 상상을 현실로 실천하는 분들이 과거에 있었거나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불안감 때문이겠지 뭐. 소수의 이런 인간들 때문에 세금으로 지원 받는 각종 사업들이 '페이퍼워크'라고 불리는 각종 잡무로 물들어 간다. 사전 예방을 위해서 수많은 기업과 담당자들이 서류에 파묻히는 것보다는 사후 처벌 수위를 높이는 게 전체적인 효율을 높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일단 사고가 나면 안 되는 기관들 입장에서는 그게 안 되겠지요. 왜냐하면 일이 터지면 누군가 책임을 지게 하니까요. 국감에도 끌려가야 하고 기자들은 신이나서 또 씹고 맛보고 물고 뜯고 하겠지요.     

불신이 낳는 건 비효율, 불신을 강화하는 건 언론

10년 넘게 기자로만 살았으나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한발짝 떨어져 나와 언론을 보면, 기자 시절 나는 다소 독립적인 여론의 한 주체이고, 언론사는 다들 좋은 콘텐츠를 독자들에게 낙점 받기 위한, 또는 여러 생각할 거리들을 선제적으로 제시해 토론을 이끄는 그런 경쟁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 3자적인 시각에서는 그냥 집단적인 여론 뭉치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느껴진다.

이 여론 뭉치는 과제 관리자들이 소심해지게 만드는 원흉이다. 관리자의 권한이 명확하고 사후 처리 시스템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뭔가 불법이나 탈법이 적발되면 '책임지는 사람 없는... ' 이런 류의 유사한 제목들이 하루에 많게는 수백건씩 나온다. 실제 관리상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그게 담당자가 진짜 책임져야 할 일인지, 유사사건 발생 방지를 위해 비효율을 늘리는 게 타당한지 등에 대한 고찰은 없고, 하루하루 비슷한 기사의 물결이 개개인 직원들의 삶을 휩쓸고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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